거울처럼 새벽에 붙여놓은 입김이 희미해졌다 내 생애 오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벽에 끼어있던 사진 틀처럼 지난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울 이제까지의 나를 다 끄집어내도 내가 없다 지금의 내가 없는 지금의 나 지난밤 비에 씻겨 내려간 창밖의 시간처럼 눈썹 하나 건질 수 없는 지난날의 나
촛불 밤비가 깊다 가로등도 끝난 깊은 밤이 샐 수 있을지 어둠은 기다리지도 않는다 굵은 어둠으로 변하는 밤 빗줄기 별 있던 밤하늘을 방안으로 옮겨 놓는다 하나둘 가을밤으로 번지는 촛불 가장 뜨거울 때 밤보다 짙은 어둠을 삼키며 가장 고독할 때 누군가의 짙은 눈물을 닦아주는 귀향을 잃어버린 배의 등댓불 같은 내 속의 심지 하
커피와 액정 뜨거운 커피 한 잔으로 무거운 액정을 밀어 올린다 액정을 볼 때마다 커피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커피를 마실 때는 액정을 밀기만 한다 물고기가 물에서 눈을 뜨고 있듯이 액정에서 꺼내 놓은 세상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커피 향을 따라 돌돌 말리던 액정은 주춤주춤 밀어 올린 시간들을
흑백 사진과 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남겨둔 시절이 잘못 묻어둔 어둠처럼 컴컴하다 그렇게 화사하진 않았지만 남몰래 나만의 나를 가두어놓은 책방 같은 공간 새까만 글자 대신 한참 철 지난 소녀가 멋쩍게 웃고 있다 그때는 그게 제일 잘 나가던 폼이었다고 위안 삼아 말을 삼켜보지만 주
우리는 라면처럼 오돌도돌하지만 국수처럼 시원한 맛집이 있기를 바란다 한때나마 누군가에게 한참은 기억되는 누구이기를 원했던 것처럼 가을은 이미 가을 속으로 들어갔지만 여름을 놓지 못한 달빛이 아직도 달무리 안을 붉게 휘청거린다 떠날 것 같지 않던 장맛비를 멀찌감치 집 밖으로 내밀었
풍경은 소리로 울지 않는다 물속으로 들어간 달이 아직도 멀다 바닥을 튀어 오른 심해어가 캄캄한 어둠을 유영하듯 가라앉은 산속 물 밑의 달을 흔들던 바람이 풍경에 슬그머니 얹힌다 달빛이 흩어질 때마다 동자승의 잠결까지 졸라가며 동그랗게 뭉치는 풍경 겨우 수면으로 올라온 달
소리 없는 바람 잘 살아라, 어깨를 짚어주던 그 손바닥에서 오래된 침묵 같은 소리가 났다 거칠었지만 따뜻했던 손바닥 슬그머니 싱크대 옆에 두고 간 어머니의 씨간장처럼 잘 익은 손길 바다 밑에서 건져 올린 심해어의 비늘 같은 무겁고 어두운 숨이 또르르 떨어진다 창밖에는 아직
브레이크타임 날개는 접혀 있었다 우물우물 가을을 되새기던 오후 3시가 테이블 위에 빡빡하게 박힌다 촘촘하던 발걸음이 들녘의 가장자리를 떠돌던 바람처럼 하나둘 문턱에서 멀어져 갔다 순간을 의식한 저 무시무시한 눈초리들 12시부터 1시를 겨냥한 가장 난폭한 좌회전과 우회전의 갈림길이
달빛 푸른 숲 달을 보고 숲을 보고 나를 본다 저렇게 덩그러니 들떠서 이 말 없는 숲을 거둬들이면 나는 어떻게 나를 숨겨야 하나 소리 없는 움직임에 갇힌 저 수많은 빛 창에 갇힌 나를 넌지시 건네 보고 있었지만 이미 달을 알고 있었다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창 속의 나를 비 오는 밤이면 유독 입김이 창에 달라붙는
저 길로 가면 저 바람도 분명 길이 있어 갈테지 아무리 거친 파도라도 바닷길을 걷는 것처럼 말야 장날 엄마를 따라가던 길을 생각해봐 늘 궁금했잖아 세상에는 길이 많다지만 나 혼자 갈 수 있는 길은 뭐였을까 궁금할 때도 엄마하고 장날 가는 길만큼 기다려지진 않았어 모두가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길을 떠나지 못해 저토록 안달을
가을의 우체통 가을을 접고 돌아서는 길은 언제나 붉다 우체통에 무심히 던져넣었던 가을에 대한 빗나간 기대 때문이었을까 허수아비 곁을 건너오는 저녁놀이 사납다 가을을 건너간다는 건 장독대 위로 솟은 달빛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체통 바닥에 가라앉은 젖은 기억을 꺼내는 것 수평선에 낀 저녁 해
손톱 속의 그림 열 개의 방마다 미묘한 선들이 빼곡하다 거미줄에 엉켜있는 가랑비 같은 움직임 때로는 슬픔 웃음 같다가도 언제는 눈물이 나도록 웃기는 천연덕스러운 선들 새 떼처럼 구름을 쌓아놓고도 마른 비 없이 사라졌던 선들 몸마다 겨냥된 길목이 달랐다 목적지를 골라내야 하는 화살
판화 달빛마저 어두운 밤 흑백사진 속 어둠 같은 적막이 빽빽하게 박혀 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밝히려는 날카로운 빛이 사각사각 밤을 깍아내린다 손안의 세상을 읽으려는 손끝의 끈질긴 움직임, 집요한 추적 방황을 끝내려는 간절한 기도 거침없이 내딛다가도 이내 움츠러드는 칼날 같은 걸음걸이가 점자처
팥빙수 빙산을 빠져나온 바람이 한여름을 돌린다 턱 밑을 바짝 들어 올리는 긴 전율과 몸이 빨려 들어가는 소름이 돋는데도 눈이 가슬가슬 말린다 바람을 뭉친 파도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흔들어봐도 떨어지지 않던 한여름이 서서히 기가 죽는다 달뜬 오후가 검붉은 눈 속에서 잠시 주춤거리다가 닥
날아가는 것과 날고 싶을 때 바다를 밀고 가는 기러기 떼 묻어놓은 길을 쪼아 줄을 잇는다 버릇처럼 날아간 길 어둠이 쌓이는 저녁 길을 걷다가 보면 마지막 페이지를 접어놓을 때가 있듯이 나란히 갈 수는 없을 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을 뽑아 가는 기러기 떼를
새 페이지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낯익은 글자들이 새까맣게 튀어 오른다 새 책을 넘어오는 알 수 없는 떨림이 강한 책 냄새와 뒤섞어 뛰쳐나오던 때보다 더 진하게 울렁거린다 받아온 책 냄새가 너무 신기해서 이불 속까지 끌어당겨 밤새 킁킁대던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가만히 손에 쥐어본
벽화 수십 번을 망설이며 갇혀 있는 저 눈 그 옆에서 기둥처럼 멈춰 선 풍경 지워졌다 다시 채워지고 다듬어지다 깎였을 저 눈은 그림자보다 더 어두운 적막이 고여 있다 한때는 몹시 흔들렸을지도 모를 그러나 한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을 적막 손과 마주칠 때마다 한 움큼씩 빛보다
장터 어머니는 새빨간 아침노을을 이고 장에 갔다가 더 빨간 저녁노을을 이고 돌아오셨다 그 한나절쯤 되는 사이가 우리들에겐 설날만큼이나 돌아오기 어려운 뜸을 들였다 걸어서 가는 장터가 방금 익혀낸 햇살만큼 뜨거웠을 8월이었지만 어머니는 몸에 붙은 인고를 기다리는 아이들 눈으로 떼어냈다
새장 새장의 새는 날기 위해 깃털을 갈아입지 않는다 하늘이 뽑아놓은 계절을 쪼을 새가 없으니 벗어놓을 곳도 없다 차라리 두툼한 창살을 바짝 조인다 벽화 속에 숨어든 새들이 조그만 빛에도 가장 자유스럽지 못했던 기억을 되감기 싫어서였다 더구나 어쩌다 새장을 털어버린 새들이 더 가혹하
폭포 분명, 떨어지는 것을 알고 올라갔을까 나무도 올라가려고 공중을 향해 가지를 뻗는데 왜, 떨어지는 것을 위해 저렇게 몸을 던질까 새들의 깃털만큼 추락하는 것에 민감한 탓일까 하늘의 숨소리를 숨겨 놓은 것 때문에 저토록 모질게 숨을 참아야 하나 가끔 선녀가 내려와 옷을 숨기는 것은 상처 난 숨